손에 칼을 쥐고 있을때는 딴생각 금지.
지난 일요일,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 그래 닭갈비를 먹자. 근데 마켓컬리에서 주문한 닭갈비는 고기'만' 들어있는 녀석이기에 푸릇푸릇한 대파를 함께 볶아먹자.
대파를 쫑쫑 썰다 보니 칼질이 꽤나 능숙졌음을 느꼈고, 엇비슷한 폭의 대파 조각들을 보면서 정말 갑자기 문득, 매일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나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왜 하필 이때. 전날 2회차 관람하고온 <에에올>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며. 아 그래 이런 삶도 사랑할 수 있어야지.
하지만 일상적인 일상이 너무 따분한걸. 오후에는 뭔가 좀 재미난 일이 있었으면 좋겠ㅅ... '서걱'
분명 대파를 썰고 있었는데 닭고기를 자르는 느낌이 들었다.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서걱'보다는 '절걱'이랄까. 어라, 나는 닭이 아닌데 왜 나한테서 이 썰림이 느껴진거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찰나, 벌어진 살 틈새로 검붉은 피가 음-파! 하고 뿜어져나왔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했지만, 평소 응급처치 유튜브를 종종 챙겨봤기에(왜?) 손을 심장 위로 번쩍 들어 약 20분 정도 지혈했다. 피가 잘 멎지 않아 놀랐음에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휴지를 꽉 감싼 채로 약국으로 뛰어가 생리식염수를 사왔다. 다행인 점은 자취방 주변이 번화가여서 일요일에도 문을 연 약국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재빠르게 식염수로 상처 부위를 씻어내고 연고와 밴드를 발라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고 깜짝 놀라서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 잠에 들었고,눈을 뜨고 나서는 왜인지 모를 서러움과 외로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분명 일이 일어나기 한 시간 전만 해도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에 빠졌었는데, 갑자기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다니.
이렇게 또 무탈하게 흘려보냈던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느낀다.
평범하지 않은 일을 겪고서야 평범함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
.
혹시나 감염의 위험이 있을까 해서 월요일에 퇴근하고 정형외과에 드레싱을 받으러 갔다. 다행히 꿰매지 않아도 잘 붙을 상처라 소독만 잘 해주면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진단. 몇천 원으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심리적 안정을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의료시스템 만세!